4. 백촌강 전투 이후의 미륵 불교와 해양 이용후생문화
백촌강 전투 이후 당진의 트라우마는 상업과 종교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한반도는 일본과 일찌기 교류가 있었다는 윤명철[38] 등의 연구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고조선 예맥족ㅤ문화는 처음부터 해양문화의 속성이 크다.[39] 중국 예맥족의 근거지는 모두 해안가이며 한반도 동쪽까지도 해양에서 출발한 국가였다.[40] 따라서 두 갈래로 나누어진 상업과 종교는 모두 해양문화의 속성으로 나타난다,
먼저 종교의 경우 예맥족 계열 민족의 치유와 구속으로서의 입상불상의 조성이 이어진다.[41] 백촌강 전투의 문제는 도침과 복신이 나타나는 은산별신제에서도 나타나듯 당시 지역의 심각한 문제였다.[42] 미륵은 불교 28천 가운데서도 고통받는 인간을 위해 낮은 하늘인 도솔천을 택한 자비의 부처였기에 신라가 가져간 석가불과 달리 백제 유민을 위해 줄 수 있었다.[43] 동아시아 해양 불교 불상 조성은 특징적으로 불상이든 보살상이든 모두 입석형태로 조성된다.[44] 불상의 경우는 미륵불이나 마애불로 보살상의 경우는 관음상으로 주로 이루어진다. 이는 동아시아 해양불교를 구축한 예맥족이 가지고 있던 선조의 고인돌 거석문화에서 비롯된다.[45] 해양을 통한 불교의 전파는 루이스 랭카스터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동아시아를 넘어 인도까지 연결된다.[46] 결국 동아시아 해양불교의 입석 불상은 고인돌의 태양숭배와 연결되어 고인돌의 연장인 선돌(입석)에 불, 보살의 외양이 추가된 경우가 많다.[47]
백촌강 전투 이후의 미륵 불교 입상 조성은 국내의 경우 금산사 미륵불과 개태사 여래상, 관촉사 은진미륵 조성으로 나타났다. 당진 지역의 입석 불상은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에서부터 전통이 있어왔다.[48] 통일신라의 경우 무명의 금산사에 사상 초유의 미륵이 세워짐으로써 예맥 계열의 민족에게 치유가 되었다.[49]
같은 입석 불상이지만 백촌강 전투 이전과 이후의 불상은 차이나는 점이 있다고 한다. 특히 고려시대에 나타난 개태사와 관촉사의 경우 치유의 속성과 동시에 경계의 속성도 있다고 한다. 개태사 불상의 엄숙한 모습과 관촉사의 거대한 입상은 백제 유민에 대한 경계와 통제의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50]
해양불교의 입석 불상 가운데 국내 미륵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연화대 대신 솥이 등장한다. 솥은 예맥족에게 제왕의 상징이었는데[51] 태양과 금성을 신앙하던 예맥족에게[52] 솥이 제왕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태양에 의한 물의 순환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53] 특히 바다에 가까이 살던 예맥족 같은 경우 태양에 의한 물의 순환은 바다의 순환이 되기도 하였다. 예맥족은 미륵에 제왕의 상징인 솥을 부가하여 금산사에서 부터 미륵을 연화대가 아닌 솥 위에 조성한다.[54] 개태사에도 또한 철확이 유명하다.[55] 이는 인도 불상이나 중국불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한국 가운데서도 예맥 계열의 특성이었다.
상나라를 계승한 예맥족이 해양문화를 발전시킨 것은 상나라의 상업문화와도 연관이 있다. 한자에서 공업의 공(工)은 예맥족의 한 갈래인 공공족에서[56], 상업의 상(商)은 예맥족의 상나라에서 기원한다.[57] 루이스 랭카스터가 지적한 데로 실제 불교가 발전한 곳은 모두 상업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불교의 윤회사상과 상업의 순환은 서로 이론적으로도 통하는 데가 있었다. 티벳 또한 실크로드 위에서 불교가 번성했다. 불교의 기원을 갯벌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해안 예맥족 과거불 문화에서 보는 이론도 있다.[58] 예맥족의 태양문화는 동쪽으로는 멀리 아메리카까지 연결되어 보기도 하고[59] 서쪽으로는 중동과 북유럽에 이르기도 한다.[60]
백촌강 전투 이후 해외의 예맥족 세력은 국내와 달리 상업을 통해 세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61] 백촌강 이후 중국에 세워진 신라방, 신라소는 이름만 신라방, 신라소일 뿐 사실은 백제유민의 세력이었고 장보고의 경우는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한다.[62] 백제 유민의 대표적 정착지로 알려져 있는 주산군도 보타도에는 유명한 관음상이 세워진다.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와 같은 구법승이 당나라로 불법을 구하러 갈 수 있었던 것도 최치원이 양주에서 문명을 날린 것도 백제 유민의 해상세력과 관계있었다. 중국 또한 중국 불교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천태종은 남방의 해상불교에서 시작되었다.
해상세력은 명나라 주원장이 해상세력을 축출하는 해금정책이전까지 연결된다.[63] 장보고 이후 부각되는 대표적인 백제유민 해상세력은 태조 왕건이다. 출생이 수수께끼 같은 왕건과 더불어 해상세력은 견훤과 궁예까지 연결된다. 모두 백제 해상세력의 의중에 따라 국가의 명운이 결정되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개태사를 세워 백제 유민의 기세를 꺽어 놓는 일이었다. 나아가 태조 이후 왕권강화에 힘썼던 광종은 논산에 은진미륵을 세워 백제 세력을 위무하려고도 한다.[64] 그 후 백제 유민의 위로는 은산별신제의 무속으로 이어진다.[65]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주원장의 해금정책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백제 유민 세력은 이제 중국 밖으로 눈을 돌린다. 당시 고려말에 나타난 왜국은 이 명나라 백제유민을 돌려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한반도로 유입된 백제 해상 유민은 최영의 요동정벌 계획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백제유민의 힘을 이용해 최영은 요동을 정벌하여 백제 유민에게 나누어주려고 했다고도 한다. 반면 이성계는 국내 전제개혁을 통해 백제유민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다고 한다.[66] 조선은 이후 명의 허가 범위에서만 무역이 진행되어 고려에 비해 무역에 대해 소극적이 된다.[67]
한반도로 유입되지 않은 백제유민은 동남아로 눈을 돌려 오늘날의 화교가 되거나 일본으로 이동하였다. 상업을 하던 상나라 상인의 후손답게 대륙의 백제민은 일본에서도 개혁의 주도적인 세력이 된다. 전통적인 하느님 신앙의 영향으로 백제 유민은 임진왜란에 한국에 들어온 고니시(소서행장)의 천주교 집단이나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죠슈번의 사무라이가 되기도 한다.[68] 조슈번은 기존 일본 지역과 달랐기에 메이지 유신에 적극적이었다.[69] 백제 유민은 일본을 대표하는 오사까 상인으로 성장했다.[70]
한편 중국에 머무른 백제 유민은 하느님 신앙에 따라 중국 기독교 세력으로 유명한 온주지방의 온주상인으로 발전했다. 현대 중국 경제를 주도한다는 상인세력인 온주상인은 백제 유민이 집중적으로 살아가던 온주지방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객가와 화교, 공산혁명을 주도한 세력 또한 해양세력이었다.
메이지유신이 한창일 무렵 당진은 또 한번 전쟁에 휩싸인다. 당진은 청일전쟁에서 청군이 들어오는 접전지 이기도 하고. 또 현대사에서는 삽교천 준공식 날 10.26 사태가 나서 다시 역사의 중심에 들기도 했다.
백제 유민 신앙이 가지는 특징은 불교적으로는 윤회이지만 이는 하느님의 순환사상에 기반하기 때문에 천주교의 수입도 매우 빨랐다.[71] 한국 최초의 신부가 나온 해미읍성은 교황이 방문하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전반적인 해상세력에 의한 불교 발전은 당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당진의 경우도 남아 있는 불상은 대부분 미륵입상이다.[72] 당진의 이용후생문화로 간주된 것은 해양문화와 연결되는 부분이 많았다. 남은 예맥족 문화 소위 남조선문화와 연관된다. 예맥족 문화론은 다양한 비류백제론 등을 다 수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