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백촌강 전투 배경으로서의 예맥족 디아스포라
백촌강 전투의 배경으로서 현재 제시되고 있는 것은 삼국의 국제관계이다. 당의 팽창정책과 약소국 신라와의 의기투합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국제관계의 배경이 되는 민족적 배경을 제외한 기존 이론은 바로 50여년 전도 안 된 시기에 발생한 백제-신라와의 나제동맹이 깨어진 이유와 신라와 친했던 일본의 정권이 백제와 친한 정권으로 갑자기 교체된 이유 등을 제시하지 못한다. 또 백제부흥군의 실패 후 일본이 발해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하려 한 이유도 설명을 못한다. 그러나 삼국의 국제관계가 변화된 이유를 보다 심층적인 예맥족과 선비족의 대결로 보는 최근 중국이론은 백촌강 전투 배경으로서 예맥족 디아스포라라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백촌강 전투 배경으로서 예맥족 디아스포라를 제시하는 대표적 중국학자는 이덕산이다.[20] 1995년 <동북사대학보>에 발표한 논문 '동북고민족 동이기원론’에서 이덕산 교수는 동북아에 있던 한반도 고유민족을 예족과 맥족으로 구분하고 삼국시대 이후에 한반도로 내려온 선비족 계열의 민족과 차별화한다.[21]
이덕산 교수의 이론을 한국사에 적용하여 동이한국설을 주장해온 이기훈은 기존 백촌강 전투 당시의 한-중-일의 관계를 선비족 세력인 신라-당과 토착 예맥족 세력인 고구려-백제-일본-발해의 대결 구도로 설명한다.[22] 실제 연나라 침략 이후 삼국사기에 나타난 삼국사는 전문 역사가도 의혹을 제기한다.
기존의 예맥족 중심으로 이루어진 한반도에 선비족이 개입되는 것은 낙랑의 멸망부터이다. 낙랑의 멸망은 연나라를 세운 선비족 모용씨가 북위에 밀려 한반도로 이동하면서 생겨난다.[23] 연나라 세력이 한반도로 온 이후 힘이 악한 백제와 신라의 왕과 지배층은 연나라 선비계열인 모씨로 임금의 성이 바뀌었다.[24] 신라의 경우 모용씨의 다른 이름인 모씨 법흥왕이 정권을 잡고 연나라와 같은 중국식 국가체제를 갖춘다. 백제의 경우 모씨인 문주왕(475-477), 동성왕(479-501)이 왕위를 계승하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킨다. 중국기록 『수서』에는 법흥왕(514-540)으로 보이는 백제계 사람인 선비족이 신라의 왕이 되었다고 나온다.[25] 일본에서도 기존의 예맥족 부여계 정권인 아스카 정권이 물러나고 모용씨 계열의 친신라계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정권이 들어선다. 법흥왕 모씨 정권이 수립되기 전만 해고 광개토대왕비에서 보여주듯 고구려의 속국에 가까웠던 신라는 국력이 강성해지며 백제와 함께 동맹하고 고구려와의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백촌강 전투가 일어나는 당-신라 동맹과 백제-일본 동맹은 이 한중일의 연나라 선비 모씨 체계가 백제와 일본에서 동시에 붕괴되면서 생겨난다.[26] 중국은 모용씨의 연나라를 몰아 내어 원수로 지내던 북위가 우문선비 계열인 당나라로 교체되고 신라에 비해 힘이 있었던 백제와 일본에서도 각각 정변이 일어나 모용씨 계열 선비족은 축출되고 다시 예맥 계열인 부여씨 계열이 백제와 일본의 정권을 회복한다. 부여씨 계열의 백제-일본이 성립되면서 기존의 신라와 백제의 나제동맹은 깨어지고 신라는 당에 의지하게 된다. 이후의 역사는 이미 잘 연구된바 있지만 결국 기존 연구에서는 이러한 민족적 배경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당진의 트라우마는 결국 1980년에 걸친 예맥족 정권의 몰락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신라 황룡사는 실제 신라가 모용선비의 국가였음을 알려준다.[27] 연나라 왕의 명칭이 조선왕이었고 국가이름은 황룡국이었다. 즉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황룡사 사건 이후 백제와 신라는 연나라를 세운 모용선비 계열에게 흡수된다. 그러나 무령왕 이후 백제는 모용씨 계열에서 벗어나고 홀로남아 위기에 빠진 신라는 같은 선비계열인 수-당과 협력한다. 이후 선비 계열인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예맥 계열이 된 백제-고구려-왜의 연합전선이 형성된다. 같은 예맥 계열이었지만 특히 백제는 한반도 토착세력인 예족과 가까웠고 고구려는 산동반도에서 넘어온 맥족과 가까웠다. 실제 오늘날 유전자 지도에서도 한국은 중국계-맥족과 토착-예족, 북방 선비족의 유전자가 골고루 있으며 한중일의 유전자가 갈라진 것은 백촌강 전투가 있던 1200여년 전부터라고 한다.[28]
중국측 기록을 집중 조사한 이기훈에 따라 삼국을 보다 상세히 살펴 본다면 신라는 단군뿐 아니라, 은나라(상나라 B.C 16세기~ B.C 11세기)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29] 왜냐하면 신라는 낙랑의 후손이라 주장했었는데, 낙랑은 요서에서 이주한 기자조선의 후손이고, 기자조선은 중원의 은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나라였기 때문이다.[30]
고구려는 은나라(상나라)와 관련이 깊은 맥족과 예(부여, 왜)족, 그리고 중국 동부(산동)의 만이로 불리던 구이 세력이 주축이 되어 세워진, 예맥족(해모수 세력)과 구이족(하백 세력)의 연합국이다.
백제는 처음 한반도 주인인 예(왜, 부여, 온조왕백제)에서 한(漢, 대방, 초고왕 백제)으로,다시 동쪽 예(동예, 동부여, 왜, 비류왕 백제)로, 북부여(근초고왕 백제) 또 다시 중원의 주인이던 연나라(모용 선비국, 동성왕 백제)로 지배층이 바뀌다가 마지막에 모용 선비계 (동성왕계)를 벗어나 북부여를 회복하려다 멸망한(성왕 백제) 다문화, 다국적 국가가 된다.[31]
왜(예, 일본)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B.C 3세기 한반도의 대혼란을 피해 일본열도로 이주한 한반도계 청동기인들(야요이인)이 세운 나라로, B.C 10세기 이후 만주와 한반도의 민무늬 토기 세력(예족, 부여족)이 중국 연나라, 제나라, 맥족(기자 조선, 낙랑)의 지속적인 공격에 밀려 한반도 남부를 거쳐 정착한 나라이며, 서쪽에서 밀려오는 연나라, 맥족 세력 (기자조선, 한군현)에 대항하여 만주, 한반도에서 끝까지 싸우다 결국 일본 열도로 축소된 나라로 간주된다. 동이한국설 이전에는 비류백제설이 있고[32] 지금도 마한지방 연산강유역이 집중 조사되고 있다.[33]
당진지역에 이를 보다 적용한다면 당진의 향토 연구가 박성흥의 이론을 적용할 수 있다. 향토연구가들은 영산강 유역이 마한지방문화로 주목받는다면 당진은 진번군과 목지국으로 비정될 수 있다고 한다.[34] 진국을 신라의 기원으로 간주하며 신라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기존 이론과 달리 박성흥은 백제가 진국의 정통이었고 이것이 가야로 연결되어 다시 신라로 흡수되었다고 한다 한진이란 이름의 기원은 한사군중 진번에서 비롯된다고 한다.[35] 한사군중 가장 빨리 망했다는 진번국이지만[36] 한사군의 문화를 빨리 흡수할 수 있는 진번국이 세워질 때의 당진은 초기 가야였다.[37] 실제 당진에서 가장 큰 산은 가야산이다.
결국 당진은 기자조선에서부터 출발한 예맥-한사군-가야의 디아스포라이고 이를 백제와 공유하고 있기에 선비 계열인 당-신라와 예맥 디아스포라 백제-왜의 세계대전을 반드시 치루어야만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