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단군사상과 서양 한류
서양 한류는 서양과 한국의 교류사라 할 수 있다. 한국인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류의 인기인 보편성은 고대로부터 전해진 서양 한류의 한국 문화유전자 발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일찍이 박용숙은 현대 모더니즘(modernism)의 어원이 무당의 무(巫)에서 나왔다고 밝힌 바 있다.[42] 살제 4차 한류까지 논의되고 있는 한류는 지금가지 한류의 인기비결이 삼신 모계와 연계된 여성문화라고 한 바 있다. 『대장금』, 『겨울연가』, ‘방탄소년단’의 공통 코드는 보편성과 여성성이라고 한다.[43]
이 여성성은 흑백논리로 지칭되는 서양 이분법에 대비하여 한문화로 불리워 왔고 입체오행적으로 보면 입체·순환·공감이 된다. 실제 황태연은 마테오리치가 전한 유교의 공감에서 서양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44] 입체는 삼수분화를 나타낸다.
서양한류의 과정을 살피려면 보다 서양 고대,중세의 단군기원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한류는 오늘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고대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서양한류 또한 고대사로부터 시작된다.
고대사의 실증적 연구로 최근 주목받는 단군사상 연구가인 우창수에 의하면 AD 7세기까지 세계사는 한민족사와 같다고 한다.[45] AD 7세기까지 세계사가 한국사와 같다는 우창수의 이론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AD 7세기까지의 서양 한류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우창수에 의하면 세계사는 AD 663년 백제 패망을 기점으로 크게 변했다고 한다. 663년은 음양오행으로 보면 1980년 마다 한번 씩 도해하는 4갑자의 날짜다. 즉 오늘날 문자 기록으로 역사가 남아있는 시대 중 가장 가까운 4갑자일은 곧 계해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는 663년 동지이다. 이 시대 천문은 일렬로 수직수평을 이룬다.
이 때가 일본-백제 연합국에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백잔성 전투의 마지막 날이다. 백제-일본과 나당연합국의 전투는 1,000여년에 걸친 중국의 숙원 사업이자 탁록대전 이후의 최초의 세계대전이라 할 만하다. 서양 한류의 망각은 이때로부터 기원한다. 백제 패망이후 다시 당나라와 신라간에 전쟁이 있었지만 백제와 고구려 유민은 신라와 협력했고 이를 애도하기 위해 금산사가 지워진다.
663년을 기점으로 당나라는 한자의 근원인 해서를 비롯하여 고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중국으로 최종적으로 이전시킨다. AD 7세기 이후 세계사가 한국사로 인식되지 못하는 이유는 이때 역사가 해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다. 실제 서양의 테렌스 매케너는 주역 서괘전의 순서대로 벡터를 적용한 요임금 시절부터 역사가 시간의 벡터 그래프와 일치된다고 한다. 이 시간함수 연도표로 본다면 한종섭 선생이 2018년 추계신인류학회에 발표한 불교의 한반도 기원론이 매우 설득력을 가진다. 솥과 시루의 순환원리도 순환법칙과 매우 일치한다.[47] 실제 옴마니반메훔의 연꽃과 훔 그리고 미륵의 마이트레이야는 태양과 태양의 순환원리를 나타낸다고 한다.[48]
트로이 신화가 역사로 밝혀졌듯 우창수는 오늘날 단군의 역사도 중국의 동북공정과 서북공정에 의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고 한다. 하나라까지만 인정하던 중국은 오늘날 스스로를 신농씨와 황제의 후손이라는 염황지손이라 부르며 연대기를 염제 신농씨와 황제까지 확대한다. 요임금의 나라를 도사문명으로 비정하고 서쪽 장족으로부터 염제 신농씨와 황제가 시작했다고 하며 1만여기가 넘는 고분이 있어 아사달과 가장 연관되는 돈황을 서북공정으로 연결시키려 한다[49] 입체오행과 고대사의 여러 이론을 연결하여 서양한류를 살펴보면 대략 시대순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7만년-1만2천년
최근 고고학과 유전학의 발견에 따르면 서양 한류의 기원은 7만년전으로 비정될 수 있다. 『환단고기』와 달리 『신사기(神事記)』는 역사의 시작을 7만년으로 추정하다. 환인7명이 7만년을 다스렸다는 것이 난해하여 『환단고기』는 비켜간다고 한다. 그러나 7만년은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한국인이 가장 많은 이유를 보여준다.[50] 7만년은 고고학적으로 대 지각변동이 있었던 해로 간주된다. 이 때 왜 새로운 인류가 탄생했는가를 고고학은 보여준다.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보다 우수 유전자라는 것은 오늘날 뒤집혔다.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한국인이 세계최고라는 것은 오늘날 한류 붐이 유전자적 요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동아시아로 올수록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많아지고 특히 구글 발표로 추정하면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이 된다.[51]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고 아프리카 르완다에는 한국어와 유사한 언어가 있어 이를 추적하면 한국어의 어근을 다 추적할 수 있다고 한다.[52]
우창수는 인류가 마고신화와 같이 인류가 모계사회로 6만년을 살아왔기에 오늘날 문명이 가능했다고 본다.[53] 모계사회의 특징은 벌이나 개미와 같이 100만단위에 이루는 거대문명을 구축한다고 한다. 반면 수컷이 지배하는 유인원류는 겨우 7-8명의 단위를 유지한다. 이 기간 인간은 유전자가 변할 만큼 협력적인 존재가 되어 실제 사냥으로 맘모스를 전멸시킬 만큼 협력체계가 발달되고 전쟁으로 두개골이 파열된 시체가 아직 발견되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문명이 지속되었다. 성경에도 이러한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 우창수는 부여신화의 아란불과 아브라함의 내용이 일치함을 강조한다.[54]
모계사회는 동양사상의 상징인 태을, 바둑판과 연결된다. 단군신화의 마늘을 만을(卍乙)로 해석하며 태을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혹자는 부도지의 마고성은 바둑판과도 일치한다고 한다.[56] 오늘날 불교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卍은 방향은 반대이지만 아리안족의 상징이었고 아리안족은 중앙아시아 곧 돈황에서 내려온 마고족과 연관된다. 이 만을이 중국 한나라때 태을과 옥황으로 나타나며 천황지황인환의 삼황 그리고 옥황은 마고 삼신과 연관된다. 卍은 입체오행에 의한 순환법칙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쌍어문과 태극의 시원이 된다. 입체오행적으로 마고삼신은 입체오행의 3가지 축을 상징할 수 있다. 음양오행의 문제해결원리로 천지인이 부각되고 문명의 이기를 만드는 원리로 이때 부각되고 한자, 한글 또한 그 기초가 형성된다.
2. 1만년2천년-요임금(BC 2333년)
한자에 성경의 창세기가 들어 있다는 것은 한자가 어느 시대에 고안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57] 박용숙은 이 시기 대표적 유적인 차탈휘이크’를 복희와 연결짓기도 하고[58] 최근 괴페클리 테베 유적과 기타 고고학적 발견은 결정적으로 1만2천년성을 입중한다.[59] 7만년설과 함꼐 1만2천년설은 소강절의 원회운세와 매우 부합한다. 우창수는 이 시기 한자가 만들어 졌으며 한자도 한글처럼 200여개의 형태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 시기 복희씨는 중국에서는 환단고기와 달리 환웅으로 간주될 수 있는 황웅으로 나타나고 황제는 한국인의 조상이 되는 전욱고양씨(고구려), 소호금천씨(신라) 의 후손을 남긴다. 이승규는 당시 1만리를 다스리던 천제가 부루태자에게 임금자리가 넘겨지지 않고 요임금 대신 순임금에게 황제가 넘겨지게 되자 군자국은 분리되어 『규원사화』같이 47대를 전하게 된다고 한다.[60]
우창수에 의하면 이 시기는 그리스, 로마에 이르기까지 고조선 아사달 문명이 널리 전파되는 시기다.[61] 오늘날 순다랜드로 알려진 가라앉은 대륙은 유라시아를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했다고 한다.[62] 고대 그리스의 언어 곧 아르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 용어와 인명에는 고조선으로부터 흘러 들어간 언어와 철학요소가 다분하다. 실제 그리스와 인도에서 동시에 발생한 지수화풍은 음양오행과 유사하다.
그리스, 로마는 인도문화와의 연관성이 일찍이 주목되었는데 그리스문화의 배경이 된 인도문화 또한 아사달의 영향이 다분하다. 인도 문화의 기본이 된 리그베다, 우파니샤드는 천부경과 같은 삼수분화 원리로 가득하고 실제 타고르나 남방이론가 김병모 박사가 만난 인도박물관장 등 인도 상류층은 아사달문화와 연관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유튜브에서 널리 알려진 김정민의 카자흐스탄 고조선 이론이나 60년대부터 널리 알려진 박용숙 이론은 뒷받침을 하고 있는 이론이다. 이런 가설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그리스 예술의 양식, 전 세계 종교의 기원이 된 마이트레이야(미륵), 옴마니 반메훔과 같은 산스크리트 어원의 기원이 한국에서 시작되었음을 설명해준다.[63]
우창수에 의하면 황제는 오늘날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황제의 성씨를 김씨로 비정한다고 한다.[64] 19세기 프랑스의 최고 중국전문가로 불리던 라쿠페리는 일직이 황제는 바빌로니아에서 왔다고 한 바 있다.[65] 이후 일본은 현재까지 중국문명의 바빌로니아 기원설을 주류로 하고 있다. 김은 여진족과 서양어로는 아이신이 되고 이는 철을 뜻하는 서양의 수많은 단어, 그리고 청나라 애신각라에까지 연결되고 주지하다시피 한국인은 가장 김씨가 많고 파생된 김씨까지 따지면 거의 50%에 육박한다고 한다. [66]
단군은 당시의 많은 지역에서 가르치는 존재로 수많은 문명에서 나타나며 이때의 역사가 오늘날 서양한류의 원조가 된다.
3. 요임금(BC 2333년) -한나라(BC 2세기)
설총이 그렸다는 단군 영정과 사르곤의 모습이 유사하다는 것은 고대사의 동서교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67]
구글 검색으로 가야와 같은 어근인 kara를 검색하면 수많은 지역에서 검색되고 사르곤은 단군과 발음이 같은 것이라고 한다.[68] 이승규는 단군이 천군으로 당시 일종의 지방 제후개념이었다고 한다 두 이론을 합치면 세계제국이었던 군자국의 제후로써의 사르곤도 가능하다. 아프리카 르완다어가 한국어가 같다는 최근의 발견도 이 시기 홍수로 인해 한반도로 문명이 이전했다고 한다.[69]
경제사상분야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때부터 삼수분화의 입체오행은 평면입체로 해석된다.[70] 성경의 바빌론 전설과 같이 이때 세계는 입체오행과 평면오행으로 분열되고 주류문화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전환된다. 평화시대에 전쟁의 시기로 진입하는 시기가 된다.
특기할 것은 은나라 때 유물로 발견된 은허 유골의 수많은 상처이다, 우창수는 은허 유골의 수많은 상처자국은 은허유적이 몰살된 훈적이며 몰살의 원인은 고조선 대신 하늘의 점을 본 시도때문이라고 한다. 663년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중국은 군자국의 지위를 가져오려 한다.
4. 한나라(BC 2세기)-663년(백제 멸망)
한나라 때 음양오행이 부각되는 이유는 아직 정확히 풀리지 않는 난제이다. 환단고기에서 음양오행의 계보는 요임금때부터 나오지만 중국기록에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시작되어 한나라 동중서때 확립된다. 중국 글자를 한자(漢子)라 하고 중국을 한(漢)이라는 글자로 쓰듯이 오늘날 고조선 문화를 중국이 대표하게 된 계기가 이 시기부터 시작되서 당나라 때 마무리된다. 음양오행과 더불어 한나라때 유행하는 도교는 고구려, 부여로부터 수입되는 것이다. 도교는 고구려로 역수입된다. 안동준은 『옥추보경』에 나타나는 도교의 뇌성신인 구천응원뇌성도 고구려 부여의 신화에서 비롯된다고 한다.[71]
한고조의 전략가 장량과 삼국지 유비의 공통점은 짚신장사라고 한다.[72] 짚신은 군자국을 계승한 고구려가 중국에 보낸 작전세력의 코드라고 한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수많은 자원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략한 것은 이 주도권과 정통성을 가져오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한다.
5. 663년(백제멸망)-마테오 리치(1610년)
우창수는 백제가 멸망하고 글자까지 중국에 넘기어 나타난 것이 신라의 이두라고 한다.[73] 당나라 이후 한국은 자기 역사를 쓰지 못하고 우회적으로만 기록하게 된다. 8은 고조선을 상징하는 숫자라고 한다. 중국 사람들이 그토록 8을 좋아하는 이유는 8이 재물을 상징한다기 보다 8이 고조선의 숫자 때문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굳이 나라를 8개로 구분한 것은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정신 때문이라고 한다.[74] 실제 고종이 청일전쟁 후 독립하면서 가장 먼저한 것은 오늘날 남아 있는 수많은 팔각정을 세운 것이라 한다.
중국으로 넘어간 고조선 문명은 송,원,명을 거치며 결국 발전이 지체되고 서양으로 건너온 예수회 신부 마테오리치의 번역사업에 의해 서양으로 다시 넘어 간다고 한다. 라이프니쯔는 마테오리치의 번역을 통해 주역을 이진법으로 과학으로 해석하였고 기독교 없이 도덕사회가 가능한 중국모델을 통해 새로운 근대문명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근대문명을 샤머니즘을 뜻하는 무(巫, mod) 어근을 사용하여 서양은 모더니즘이라고 불렀다.
근대 서양이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기독교 없는 도덕사회 실현’의 핵심개념은 공감이었다. 근대서양이 중국 도덕에 가장 주목한 것은 맹자의 ‘물에 빠진 아이’ 이론이었다.[75] 물에 빠진 아이이론이 서양 사람에게 맹자에서 그토록 중요했던 것은 도덕의 근거가 인간의 공감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맹자는 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 인간이 구하려고 하는 것은 합리적 계산 혹은 역지사지의 태도가 아니고 인간에 내재된 공감하는 본성 때문이라고 하여 공자의 인사상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맹자의 인을 서양은 공감으로 해석했고 이는 흄에게 집대성되어 아담스미스의 경제사상으로 연결되었다.[76]
아담 스미스는 흄의 공감이론을 노자의 무위자연과 연결시켜 오늘날 자본주의 기초가 되는 자유방임경제이론을 정립했다. 이는 19세말 영국이 정치적으로 중국의 과거제도를 동비하면서 정치적으로도 완성된다. 일제의 영향으로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는 반대로 서양이 미개한 동양을 계몽한 것이 아니고 고대로부터 서양이 고조선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휴머니즘은 천부경의 단군사상이 특히 부각된다.
오늘날 한류에 열광하는 서양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고조선의 영향에 대한 연구는 최근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까지 연결된다. 이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대륙에 일고 있는 한류의 배경도 잘 설명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