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회암사의 유래
회암사도 금강산과 같이 그 동안 주목받지 못했지만 매우 많은 의문점을 남기는 사찰이다. 회암사는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고 국제 불교계에서 가장 거물이었던 지공이 직접 과거불의 수행터로 수기를 주고 지은 절이며 조선 역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절임에도 불교적인 측면에서만 검토되어 왔다.[22] 회암사와 관련하여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점은 조선초기 대두배경이다.[23] 회암사는 한국 역사상 가장 큰 절이로 건축을 하게 된 시대적 배경은 연구되었지만 건축 후 조선시대에까지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에 의해 대두되게 된 배경은 거의 조명되지 못했다.[24]
회암사 터는 인도 왕자였던 지공(指空)대사가 북경에서 석가의 화신으로 추앙되고 원나라 왕실에 봉사하는 중 중국 북경으로 유학간 나옹과 무학대사의 권유를 받아 금강산의 담무갈 보살 유적을 2년여 소요하고 방문한 곳이다.[25] 지공은 회암사터에서 이곳이 인도의 과거불 수행터인 서천 아란불사와 유사한 곳이라 했고 후대에는 가섭불이 설법하던 곳이 서천 아란불사는 뿐 아니라 회암사터로 간주된다. 그 근거로 회암사터를 세 개의 산과 두 개의 물인 삼산양수라 했다. 삼산양수에서 양수는 임진강, 한강 삼산은 삼각산으로 비정되었다. 실제 오늘날 회암사는 천보산, 해룡산, 왕방산 사이에 있고 포천과 동두천이 주변에 있다. 가섭불터라는 용어자체가 단군의 흔적이라는 연구도 있지만 [26] 삼산양수 또한 명당으로서 뿐만 아니라 삼천양지라는 음양오행적 개념도 포함되어 더 의미가 있다.
회암사가 전불시대 가람지라는 것은 과거 불국사도 받지 못한 한국 불교 최고의 위상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기존 연구는 회암사가 전블시대 가람지라는 것은 나옹의 죽음 이후 해체 위기에 바진 회암사를 살리기 위해 지공의 말을 과장한 것이라고도 한다.[27] 그러나 지공이 터를 제자인 나옹에게 직접 지정해 주었고 공민왕에 의해 세워졌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조선초기까지 매우 중요시된다. 이는 담무갈 보살 해석의 연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우선 가섭불은 석가불 세대에 출현하다는 7명의 부처중 중 6번째인 석가모니 바로 전불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과거불이란 개념자체가 이미 불교 이전 문화와 관계있다. 가섭불은 한국 고대사에서 가섭원 부여로 나타나고 현대 지명에도 중동에 카스피해가 있다. 회암사가 조선시대에까지 중시된 것은 지공의 의도와 다른 의도가 개입되었다 할 수 있다.
회암사는 우선 위화도 회군과 연관된다. 나폴레옹의 워털루전쟁처럼 위화도 회군의 결정적 계기는 원나라에 정탐하러 간 무학대사의 제보였다고 한다.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고 하여 ‘무학(無學)’대사라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 무학은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던 북경 유학파 출신이고 당대 최고 지성이던 지공과 나옹을 스승으로 모시던 인물이었다. 무학대사는 일찍이 이성계를 만나 조선을 기획한 인물로 지목되는데 무학은 국명을 ‘조선’으로 택하게 하고 경북궁 등 서울 궁궐을 천문에 맞게 지은 고대사의 해박한 인물로 나타난다.[28] 심지어 무학대사는 영해 박씨로 박제상의 부도지가 전해져 온 집안으로도 간주된다. 무학은 결국 고대사의 부활을 위한 기획으로 회암사의 중창을 나옹과 함께 기획하였다고 볼 수 있다. 회암사가 있는 천보산은 고려말부터 부활한 단군 신앙의 진원지인 행촌 이암과 관계되기도 한다.
무학대사와 고대사의 또 다른 연결고리는 금산사에 전하는 무학결의 한 구절이다. 원래 무학결은 풍수에 대한 내용인데 무학대사가 지었다고 하여 「무학결」이라고 한다. 그 글에는 ‘천황지황인황’이 언급되고 [29]‘천하지대금산’이라하여 금산사와 금강산을 연결한다. 무학대사가 금강산과 회암사를 연결시킬 수 있었던 배경은 과거 자장이 한국의 오대산을 인도 문수보살의 오대산과 연결한 것을 배경으로 삼았다고 한다. 특히 오대산은 귀족적인데 반해 금강산은 대중적이라는 점도 강조했다고 한다.[30]
무학대사가 고대사 부활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일만큼 황제/단군 이후 한국 고대사의 금강산은 부침을 겪어왔다. 금강산의 뇌성 신앙은 뇌법신앙으로 중국에 전해졌고[31] 태양과 금성의 원리는 음양오행으로 전파되었다.[32] 태양과 금성은 용봉문화의 원조로서 태양의 움직임이 음양으로 봉과 관계되고 금성의 움직임이 오행과 관계되어 용과 관계된다. 이는 수메르의 중동과 아메리카에도 오늘날 발견된다.[33] 회암사(檜巖寺)라는 지명 또한 전나무와 관계되겠지만 단군과 같은 나무 목을 강조하고 있다.
금산사가 금강산과 연결되는 것은 금산사 설립 전 663년 백촌강 전투이다. 백촌강 전투는 198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4갑자일인 663년 동지에 종결된 듯하다.[34] 백제의 마지막 전투인 백촌강 전투는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전으로 나당연합군이 백제-고구려-일본 연합국을 이겼다. 오늘날 한반도 서부의 작은 백제를 중심으로 한 전투를 국제전이라 하는 것은 당시 당나라와 싸워 승산이 있었던 백제사는 오늘날 많은 왜곡이 있었다고 한다.[35] 백제는 신라에게 패배했지만 뒤이은 신라와 당나라의 전투에서는 신라를 편들어 당나라를 물리친다. 이후 백제의 해양왕국 기술은 신라가 고조선의 군자국 이미지를 계승하는데 일조한다.[36] 일본의 큐우슈우는 단군의 九州(구주)문화를 연상시킨다.[37] 백제를 기념하여 금산사가 세워지고 금산사와 연결된 금강산에 금산사를 세운 진표에 의해 미륵이 세워진다. 무학대사의 『무학결』에 나오는 ‘천황 지황 인황 후 천하지 대금산’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변광현의 이론을 재해석한다면 백촌강 전투는 금강산을 중심으로 펼쳐나갔던 민족들이 다시 원시반본하는 원리를 가진 전투였다. 기원전 4000년 이전 복희 시대 세계에서 갯벌이 가장 큰 우리나라에서 싹튼 용봉문화는 세계 각지로 퍼져나간다.[38] 이들은 수메르, 아리아, 슬라브족을 이루면서 각자 살다가 기후변화로 다시 금강산으로 모이게 된다.[39] 이때의 흔적이 아프리카에도 남아있어 현대 한국어와 가장 비슷한 언어는 아프리카의 르완다어라는 연구도 있다.[40] 정형진은 이때 처음으로 한반도로 다시 회귀하기 시작한 민족이 신농씨 계열의 공공족이라고 한다.[41] 오광길은 이 공공족을 수메르계열로 본다. 정형진은 두 번째로 이동하는 것이 곰토템을 가진 환웅족이고 단군도 이에 연결된다고 한다.[42] 오광길은 이를 아리안족으로 보고 아리안족은 곰토템이 있었다고 한다. 현지에 있던 곰토템민족과 결합하여 범토템과는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43] 서양은 『바빌로니아에서 온 황제』를 쓴 라쿠페리[44]나 금문의 기록을 분석한 낙빈기, 김재섭은 이 당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45]
다시 변광현 이론에 따르면 요임금 시절 기록에 나타나는 기후변화로 과거 문명이 몰락하고 금강산에 세계인구의 대표적 인종이 집결한다. 당시 햇빛이 금강산에만 비추고 그 햇빛이 점점 넓어져 다시 금강산문명이 퍼져 나가는 것이 빗살무늬토기와 고인돌의 이동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다시 세계문명이 부활하여 차축시대에 이르게 된다. 금성의 여신 비너스, 아슈타르테가 중동에 분포하는 것은 여기에 이유기 있다.[46] 금강산을 벗어난 문명이 다시 회귀하여 금강산 문명이 패배한 것이 백촌강 전투라 볼 수 있다.[47] 이후 한국사는 금강산을 지키는 수준의 국력을 유지한다. 오늘날도 북한이 금강산을 지키는 역할을 본의 아니게 하고 있다. 풍수지리이론에서는 지기(地氣)도 적재적소에 발음하려면 지켜야 된다고 한다.
불교만큼 풍수지리에 밝았던 무학은 이성계와 함께 고대사 복원에 의기투합하고 이를 회암사의 대두배경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성계가 왕자의 난 이후에도 수도하기로 선택한 곳이 회암사이고 왕궁과 같은 양식으로 건축하게 한 것은 고대사 복원의 의지를 보여준다. 실제 조선왕조 내내 내부적으로 복원의지를 표명했고 고종때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지자 전국의 팔각정을 복원하여 고대사를 복원하고자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서인의 대표였던 율곡이 금강산에 대한 글을 쓴 이후로 주희의 무이구곡을 금강산에서 찾게 되었다. 이후 금강산은 김삿갓의 시에서 보듯이 민중 신앙이 된다.